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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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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종은 고려의 제6대 왕으로, 태조의 손자이자 대종의 아들이다. 981년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유교적 통치를 표방하고,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를 시작했다.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했으며, 거란의 침입에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대응하여 강동 6주를 획득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다. 헌애왕후, 헌정왕후의 간통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기도 했으며, 997년 병으로 사망하여 조카인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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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보 없음
정보 없음
이름왕치 (王治)
작위개령군 (開寧君)
신상 정보
출생961년 1월 15일 (양력)
출생지고려 개경
사망997년 11월 29일 (양력, 36세)
사망지고려 개경 내천왕사
묻힌 곳강릉(康陵)
왕조
가문왕씨
왕조고려
통치 정보
즉위981년 8월
퇴위997년 11월
이전 통치자경종
다음 통치자목종
가족 관계
아버지대종
어머니선의왕후
배우자문덕왕후 유씨, 문화왕후 김씨, 낙랑군대부인
자녀2녀 (원정왕후, 원화왕후)
칭호
묘호성종 (成宗)
시호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懿大王)
시호 (원래)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
시호 (최종)양정헌명광효장헌강위문의대왕 (襄定獻明光孝章獻康威文懿大王)
왕치 (王治)
온고 (溫古)
다른 이름개령군(開寧君)

2. 생애

성종은 960년 태조 왕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왕후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치(治)이다. 969년 아버지 대종을 여의고 개령군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마저 여의게 되자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다.[1]

981년 경종이 위독하여 내선으로 왕위에 올랐다.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왕송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 없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조카 목종을 개령군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1]

즉위 후 성종은 지방 호족 세력에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옛 신라 귀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신라 왕족 출신 여인과 혼인하였다.[1] 982년에는 유학자 최승로의 상소를 받아들여 유교식 정치를 시작하였다.[1] 최승로는 성종이 광종이 추진했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태조는 유교 경전인 ''상서''를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이상적인 황제는 농민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노고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성종은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지방 관리를 중앙 정부가 임명하고, 백성들이 사사로이 소유한 무기를 모두 거두어 농기구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했다.[1]

983년, 12목 제도를 마련하고, 각 목에 학자를 파견하여 지방의 교육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는 지방 귀족들을 새로운 관료 체제에 통합하려는 노력이었다. 또한 지방 귀족 자제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수도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982년(성종 1년) 최승로 등 유학자의 자문과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를 단행하고, 국자감에서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고려 초기의 여러 문물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유교를 국가의 지도 원리로 삼고 중앙 집권적인 봉건 제도를 확립하였다. 같은 해에 행정 개혁을 통해 백관(百官)의 칭호를 고치고, 983년(성종 2년) 2성(省)·6관을 설치하였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하였다.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 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지방에는 12목(牧)을 설치하였다.[5] 팔관회, 연등회를 폐지하고 교서를 도입했다. 광종, 성종의 노력으로 문치주의 전통이 수립되었고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갔다.

995년(성종 14년)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의 기반이 되었다.[1]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는 궁궐에서 살았고, 헌정왕후는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이웃에 살던 이복 숙부 안종(왕욱)과 정을 통하였다.[6] 왕욱의 집 가노는 이 사실을 알리려 집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헌정왕후의 임신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었다.[6] 성종은 안종을 사수현(현재 사천시)으로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안종을 배웅하다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껴 아들 대량원군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6]

成宗 十一年(九九二年) 七月에 后가 安宗의 집에서 자는데 家人이 섶을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바야흐로 크게 붙으매 百官이 달려가 구하고 成宗도 역시 빨리 가서 위문하니 家人이 드디어 사실을 告하는지라 이에 安宗을 유배하였다. 后가 부끄러워 울며 곧 집으로 돌아오다가 겨우 門에 이르러 胎動이 있어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免身)는 죽었다.|성종 11년(992년) 7월에 후(后)가 안종(安宗)의 집에서 자는데 가인(家人)이 섶을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바야흐로 크게 붙으매 백관(百官)이 달려가 구하고 성종(成宗)도 역시 빨리 가서 위문하니 가인(家人)이 드디어 사실을 고(告)하는지라 이에 안종(安宗)을 유배하였다. 후(后)가 부끄러워 울며 곧 집으로 돌아오다가 겨우 문(門)에 이르러 태동(胎動)이 있어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免身)는 죽었다.중국어

성종은 왕욱을 질책한 뒤 사수현으로 귀양보냈고, 아이는 성종이 양육하였다. 한편 헌애왕후 역시 김치양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헌애왕후는 출가하여 승려가 된 김치양과 자주 교류하다 사통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켰다. 성종은 김치양을 처형하려 했으나 헌애왕후의 부탁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 두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로 침략하자, 성종은 직접 안북부(안주)까지 나아가 군대를 지휘하였다. 이후 서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 담판을 벌여 요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또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다.[1]

993년 8월 말, 고려의 정보원들은 국경에서 거란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성종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병력을 3개 부대로 나누어 북서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려군의 선발대는 현대의 안주 근처에 위치한 본부에서 출발하여 청천강 남쪽 둑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성종은 직접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수도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2]

그해 10월, 소손녕 장군이 이끄는 80만 명(실제로는 6만 명)에 달하는 거란 군대가 내원성(奈穩城)에서 쏟아져 나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밀려들었다. 거란 전사들은 강을 건너 들판으로 흩어졌다.[2]

피 튀기는 공방전 속에서, 고려 군인들의 격렬한 저항은 처음에는 거란의 진격을 늦추었으나, 봉산군에서 거란의 진격을 상당히 둔화시켰다. 그러나 고려군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정면 공격에 굳건히 맞섰고, 후퇴하여 매복을 펼쳤으며, 거란에게 측면 공격을 가했다. 고려 전사들은 마침내 청천강에서 소손녕의 군대를 멈춰 세웠다. 이렇게 빠르고 단호한 저항에 직면한 거란은 한반도 전체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신 고려와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2]

거란 장군 소손녕은 옛 발해의 영토를 요 성종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는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성종이 요나라 황제의 신하가 되어 요나라에 정기적인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개성의 왕실은 소손녕 장군의 요구를 즉시 거부하는 대신, 거란의 최후 통첩에 대한 열띤 논쟁을 시작했다. 정부 관료들은 소손녕 장군의 요구에 응하면 더 이상의 거란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요나라 황제를 달랠 것을 촉구했다. 안주 북쪽 군대의 지휘관인 서희를 포함하여, 최근에 전장에서 거란 군대와 맞서 싸운 많은 고위 군사 지휘관들은 소손녕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개성에서 관료들이 논쟁을 벌이는 동안, 소손녕 장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주에 있는 고려군 본부를 직접 공격했다. 거란의 공격은 즉시 격퇴되었지만, 왕실을 거의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3]

왕실 귀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희 대신은 소손녕 장군과 직접 협상하기를 자원했다. 양측 모두 협상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가 송나라가 요나라에 가하는 강력한 압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란 측과 직접 대면한 서희는 거란이 옛 발해 영토에 대한 어떠한 권리 주장도 할 근거가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고려 왕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옛 고구려 왕국의 계승자이므로, 그 땅은 당연히 고려의 영토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는 교묘하게 위협하면서, 고구려 역시 한때 요동 반도를 지배했으며, 거란의 수도인 요양을 포함한 만주 지역은 마땅히 고려에 속해야 한다고 소손녕 장군에게 상기시켰다.[3] 놀라운 결론으로, 서희는 압록강까지의 지역을 고려 영토로 병합하는 것에 대한 거란의 동의를 얻어냈다. 소손녕 장군과 거란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요나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이 침략은 거란이 압록강 남쪽의 영토를 성종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끝났다. 서희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은 당시 국제 정세와 이 지역에서 고려의 위치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었다.[3]

고려가 송나라와의 동맹을 종료하기로 합의하자 거란은 철수했고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할양했다. 그러나 고려는 새로 얻은 북쪽 영토에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그 지위를 강화하면서, 송나라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3]

고려-거란 전쟁은 1018년까지 2차, 3차 침략으로 이어졌다.

유교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건국 이후의 고려는 외왕내제를 지향하였으나 그는 송나라와의 외교 정책과 동시에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사대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호족,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1] 아들을 얻으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개성의 강릉(康陵)에 능이 있다. 997년 11월에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조카인 목종이 뒤를 이었다.

2. 1. 생애 초기

성종은 960년 태조 왕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왕후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치(治)이다. 969년 아버지 대종을 여의고 개령군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마저 여의게 되자 성종과 형제들은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다.[1]

981년 경종이 위독하자 내선으로 왕위에 올랐다. 본래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왕송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성종은 조카 목종을 개령군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1]

2. 2. 즉위

성종은 961년 1월 15일에 대종의 둘째 아들이자 태조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사촌이자 매형인 경종이 981년에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1]

즉위 후 성종은 지방 호족 세력에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옛 신라 귀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신라 왕족 출신 여인과 혼인하였다.[1] 982년에는 유학자 최승로의 상소를 받아들여 유교식 정치를 시작하였다.[1] 최승로는 성종이 광종이 추진했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태조는 유교 경전인 ''상서''를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이상적인 황제는 농민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노고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성종은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지방 관리를 중앙 정부가 임명하고, 백성들이 사사로이 소유한 무기를 모두 거두어 농기구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했다.[1]

983년, 성종은 12목 제도를 마련하고, 각 목에 학자를 파견하여 지방의 교육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는 지방 귀족들을 새로운 관료 체제에 통합하려는 노력이었다. 또한 지방 귀족 자제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수도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995년 9월(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의 기반이 되었다.[1]

2. 2. 1. 즉위 초반

유교적 통치를 선언하였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 선경대왕으로 추존하고, 모후를 선의왕후로 추존한 뒤 종묘에 합사하였다.[1] 이후 태조의 기일 전후 5일,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의 기일 전후로 3일간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도살장에서의 도살을 금하고 경건하게 보냈다.[1] 호족들 중에는 불교 정책에 반하는 점과 그가 대종의 아들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1]

성종은 즉위 후 처음에는 지방의 호족들에게 간섭하지 않고, 옛 신라 귀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신라 왕족 여인과 혼인했다.[1]

982년, 유학자 최승로가 올린 상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식 정치를 시작했다.[1] 최승로는 성종이 고려의 제4대 왕인 광종이 태조로부터 물려받은 개혁을 완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1] 태조는 유교의 ''상서''를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이상적인 황제는 농민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노고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성종은 이 원칙을 따라 지방 관리를 중앙 정부가 임명하고 사유 무기를 모두 거두어 농기구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했다.[1]

2. 2. 2. 체제 정비와 외교 활동

982년(성종 1년)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정치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 등 유학자의 자문과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를 단행하고, 국자감에서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고려 초기의 여러 문물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유교를 국가의 지도 원리로 삼고 중앙 집권적인 봉건 제도를 확립하였다. 같은 해에 행정 개혁을 통해 백관(百官)의 칭호를 고치고, 983년(성종 2년) 2성(省)·6관을 설치하였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하였다.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 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지방에는 12목(牧)을 설치하였다.[5] 팔관회, 연등회를 폐지하고 교서를 도입했다. 광종, 성종의 노력으로 문치주의 전통이 수립되었고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갔다.

982년,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상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식 정치를 시작했다. 최승로는 성종이 광종이 태조로부터 물려받은 개혁을 완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983년, 12목 제도를 마련하고, 각 목에 학자를 파견하여 지방 교육을 감독하게 함으로써 지방 귀족들을 새로운 관료 체제에 통합하려 했다. 지방 귀족의 유능한 자제들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여 수도의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995년 9월 (성종 재위 14년), 처음으로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의 기반이 되었다.[1]

2. 2. 3. 헌애왕후, 헌정왕후의 사건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는 궁궐에서 살았고, 헌정왕후는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이웃에 살던 이복 숙부 안종(왕욱)과 정을 통하였다.[6] 왕욱의 집 가노는 이 사실을 알리려 집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헌정왕후의 임신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었다.[6] 성종은 안종을 사수현(현재 사천시)으로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안종을 배웅하다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껴 아들 대량원군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6]

成宗 十一年(九九二年) 七月에 后가 安宗의 집에서 자는데 家人이 섶을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바야흐로 크게 붙으매 百官이 달려가 구하고 成宗도 역시 빨리 가서 위문하니 家人이 드디어 사실을 告하는지라 이에 安宗을 유배하였다. 后가 부끄러워 울며 곧 집으로 돌아오다가 겨우 門에 이르러 胎動이 있어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免身)는 죽었다.|성종 11년(992년) 7월에 후(后)가 안종(安宗)의 집에서 자는데 가인(家人)이 섶을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바야흐로 크게 붙으매 백관(百官)이 달려가 구하고 성종(成宗)도 역시 빨리 가서 위문하니 가인(家人)이 드디어 사실을 고(告)하는지라 이에 안종(安宗)을 유배하였다. 후(后)가 부끄러워 울며 곧 집으로 돌아오다가 겨우 문(門)에 이르러 태동(胎動)이 있어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免身)는 죽었다.중국어

성종은 왕욱을 질책한 뒤 사수현으로 귀양보냈고, 아이는 성종이 양육하였다. 한편 헌애왕후 역시 김치양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헌애왕후는 출가하여 승려가 된 김치양과 자주 교류하다 사통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켰다. 성종은 김치양을 처형하려 했으나 헌애왕후의 부탁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 두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2. 2. 4. 거란의 침입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로 침략하자, 성종은 직접 안북부(안주)까지 나아가 군대를 지휘하였다. 이후 서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 담판을 벌여 요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또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다.[1]

993년 8월 말, 고려의 정보원들은 국경에서 거란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성종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병력을 3개 부대로 나누어 북서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려군의 선발대는 현대의 안주 근처에 위치한 본부에서 출발하여 청천강 남쪽 둑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성종은 직접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수도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2]

그해 10월, 소손녕 장군이 이끄는 80만 명(실제로는 6만 명)에 달하는 거란 군대가 내원성(奈穩城)에서 쏟아져 나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밀려들었다. 거란 전사들은 강을 건너 들판으로 흩어졌다.[2]

피 튀기는 공방전 속에서, 고려 군인들의 격렬한 저항은 처음에는 거란의 진격을 늦추었으나, 봉산군에서 거란의 진격을 상당히 둔화시켰다. 그러나 고려군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정면 공격에 굳건히 맞섰고, 후퇴하여 매복을 펼쳤으며, 거란에게 측면 공격을 가했다. 고려 전사들은 마침내 청천강에서 소손녕의 군대를 멈춰 세웠다. 이렇게 빠르고 단호한 저항에 직면한 거란은 한반도 전체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신 고려와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2]

거란 장군 소손녕은 옛 발해의 영토를 요 성종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는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성종이 요나라 황제의 신하가 되어 요나라에 정기적인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개성의 왕실은 소손녕 장군의 요구를 즉시 거부하는 대신, 거란의 최후 통첩에 대한 열띤 논쟁을 시작했다. 정부 관료들은 소손녕 장군의 요구에 응하면 더 이상의 거란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요나라 황제를 달랠 것을 촉구했다. 안주 북쪽 군대의 지휘관인 서희를 포함하여, 최근에 전장에서 거란 군대와 맞서 싸운 많은 고위 군사 지휘관들은 소손녕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개성에서 관료들이 논쟁을 벌이는 동안, 소손녕 장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주에 있는 고려군 본부를 직접 공격했다. 거란의 공격은 즉시 격퇴되었지만, 왕실을 거의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3]

왕실 귀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희 대신은 소손녕 장군과 직접 협상하기를 자원했다. 양측 모두 협상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가 송나라가 요나라에 가하는 강력한 압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란 측과 직접 대면한 서희는 거란이 옛 발해 영토에 대한 어떠한 권리 주장도 할 근거가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고려 왕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옛 고구려 왕국의 계승자이므로, 그 땅은 당연히 고려의 영토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는 교묘하게 위협하면서, 고구려 역시 한때 요동 반도를 지배했으며, 거란의 수도인 요양을 포함한 만주 지역은 마땅히 고려에 속해야 한다고 소손녕 장군에게 상기시켰다.[3] 놀라운 결론으로, 서희는 압록강까지의 지역을 고려 영토로 병합하는 것에 대한 거란의 동의를 얻어냈다. 소손녕 장군과 거란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요나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이 침략은 거란이 압록강 남쪽의 영토를 성종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끝났다. 서희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은 당시 국제 정세와 이 지역에서 고려의 위치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었다.[3]

고려가 송나라와의 동맹을 종료하기로 합의하자 거란은 철수했고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할양했다. 그러나 고려는 새로 얻은 북쪽 영토에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그 지위를 강화하면서, 송나라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3]

고려-거란 전쟁은 1018년까지 2차, 3차 침략으로 이어졌다.

2. 3. 생애 후반

유교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건국 이후의 고려는 외왕내제를 지향하였으나 그는 송나라와의 외교 정책과 동시에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사대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호족,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1] 아들을 얻으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개성의 강릉(康陵)에 능이 있다. 997년 11월에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조카인 목종이 뒤를 이었다.

3. 현종과의 관계

성종은 자신의 외조카(헌정왕후의 아들)이자 사촌 동생(왕욱의 아들)인 현종을 친자식처럼 양육하였다. 성종의 둘째 부인 문화왕후 김씨의 딸은 훗날 현종의 1비 원정왕후가 되었고, 셋째 부인 연창궁부인 최씨의 딸은 현종의 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따라서 현종은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7]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대종? - 969년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 추존 국왕
선의왕후 유씨? - ?태조와 정덕왕후의 딸
왕후문덕왕후 유씨? - ?광종과 대목왕후의 딸
왕후문화왕후 김씨? - ?[8]김원숭과 화의군대부인 왕씨의 딸, 1029년(현종 20년) 왕태후로 책봉
후궁연창궁부인 최씨? - ?최행언과 풍산군대부인 김씨의 딸
장녀원정왕후? - 1018년문화왕후 소생, 현종의 왕비(제1비), 현덕왕후
차녀원화왕후? - ?연창궁부인 소생, 현종의 왕비(제2비)


5. 성종이 등장하는 작품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김명수가 연기하였고, 청년 시절은 최우혁이 연기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of Sangju https://www.sangju.g[...] 2024-01-23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07-30
[3] 서적 The History of Korea, 2nd Edition https://books.google[...] ABC-CLIO 2014-05-30
[4] 서적 고려사》〈세가〉권3
[5] 서적 《[[:zh:s: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卷六 廣州牧: “成宗二年初置十二牧”
[6] 서적 고려사 후비 열전
[7] 서적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 실록 (들녘, 1996) 참조
[8] 문서 1029년 이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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